22 May 2015

교회를 통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상도

저는 경상도 포항지역의 유교 문화와 정서가 강한 시골의 한 집성촌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한 달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집안 제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었으나, 교회 다니는 집은 두세 가정밖에 되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신실한 불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점이나 사주팔자에 강하게 의존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중학생 시절 형 하나가 사고로 죽은 이후 어머니는 기복적 신앙이 더 강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형의 위패를 포항 형산강 주변의 한 절에 모시고, 영혼결혼식을 올리시고, 연말 새해와 형의 기일에는 그 절에 헌물을 갖다 바치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기복적 신앙의 모습이 싫어 저는 어머니와 자주 대립하곤 했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도 아닌 무종교자였습니다. 생활면에서는 친불교적 성향이었으며,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한 반발심이 있었습니다. 서양 제국주의의 시기에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동양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주변에는 기독교인 친구들이 많지 않았고, 특별히 저를 전도하고자 하는 친구들도 없었습니다. 어릴 적 일주일 동안의 여름 성경학교에 하루 참석했던 것이 교회 혹은 기독교와의 첫 접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도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 중 토론과정에 기독교를 믿는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답답한 내용 또한 많았습니다. 대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 하던 날 저에게 접근한 네비게이토 전도자가 있었으나, 오히려 반감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수 학원에서 만나 같은 대학교에 같이 입학한 소울 메이트에 가까운 친구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저를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지만, 저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친구의 말이 기독교에 대한 저의 마음을 녹여준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대학원 입학과 함께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만 교회를 다녔지만, 목사님의 설교 중 성경 인용이 많아 성경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책을 찾아 공부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거나, 청년부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청년부 목사님들의 권유로 기본적이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깊지 못했습니다.
유학 준비 중에 아내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등록하고 새 신자 공부를 하면서 짧은 시간에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할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교회로 가게 되든 새 신자 교육만큼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교육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혼과 함께 텍사스에서 유학을 시작했고, 유학생 교회의 구역예배를 통해 깊이 있는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시계추처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지만, 유학생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이외에도 금요일 저녁에 구역예배와 철야 예배를 통해 서로의 필요와 간구, 기도 제목을 나눔으로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신부이며 각 지체는 한 몸의 일부를 이루며 다른 부분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는 비유를 교제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첫째 아이를 얻게 되었고 부모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에 극적인 예수님과의 만남이나 기적, 이사 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잔잔히 믿음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출산 예정일을 3개월 앞두고 조산했습니다. 한 아이는 정상 크기였지만, 다른 아이는 너무 작아 생존 확률이 50%밖에 안 되었습니다. 한 달여 만에 도리어 정상 크기로 태어난 아이를 잃고 작은 아이도 5개월 동안 병원에 있다가 겨우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퇴원은 했지만 아직도 많은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기도 가운데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해야 했고, 지도교수와는 갈등이 있었고, 조교로서 강의도 한 과목 해야 했습니다. 아이가 있는 병원은 9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 아내와 번갈아 가면서 병원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또한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해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이 시기에, 교회의 모든 지체가 우리 가정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고, 요리할 시간조차 없었던 우리 가정을 위해 반찬을 해 주시는 등 여러 가지로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가정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으로 다가와 주셨습니다. 아직은 작고 약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매 순간 숨 쉬는 것, 성장하는 것, 말을 배워 가는 것, 뛰어다니는 것, 웃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